petrus잡동사니/여행과 레저 & FAM Tour

성복동 성당 예비자 성지순례 ― 죽산성지

petrus(베드로) 2009. 6. 16. 18:26

 

 

 

 지난 14일 성복본당 예비신자 등 65명은 가슴설레며 성지순례길에 올랐습니다.

오전 9시 정각, 김정곤토마신부님께서는 순례자들에 강복하시면서

"성지 입구에 있는 돌이 순교자들과 애환을 함께한 돌"이라고 자상하게 설명해 주셨습니다.

아래 사진은 이날 동행하셨던 김영자보스꼬수녀님께서 예비신자 부부에게

신부님께서 말씀하신 돌에 대해 설명하고 계신 장면.

 

 

무명순교자 묘역 제단앞에서 내려다본 죽산성당,

죽산성지입구는 국도 38호선-죽산성지 0.96km 연결도로 공사가 한창이었습니다.

성지 내방객 및 주민 이용 편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죽산성지의 6월은 장미의 향연으로 꽃대궐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순례길에 오른 예비신자들을 축복하듯 날씨도 화창했습니다.

  

 

 

 

십자가의 길을 마치니 죽산성당의 미사시간인 11시.

성체성혈대축일을 맞아 드리는 성지에서의 미사라 더 뜻깊었습니다.

이용남골롬바노신부님은 창세기 1장1절부터 신약을 아우르는 강론을 통해

'죄'의 봉헌과 하느님 사랑, 이웃사랑을 강조하셨습니다.

알기쉬운 강론으로 예비자들의 마음을 열어 '천주당 입당'서약을 받아내기도하셨습니다.

 

 

예전 관아 형상의 외곽을 돌아 정문에 들어서니 앞쪽으로 보이는

순교자 묘역과 제단뒤쪽엔 작은 동산, 그 동산에서는 예수님이 내려다보고 계셨습니다.

봉헌초에 순교자들의 영원한 안식과 이 세상의 평화를 위해 촛불을 켭니다.

대나무창 형상의 탑이 묘역의 양쪽에 하나씩,

묘역 뒤 작은 동산에 '십자가의 길'이 아담하게 꾸며져 있었습니다.

  

 

 

 

 성지에서 만나게되는 무명순교자님들,

순교라는 큰 업적을 남기셨음에도 기록에 없어 성인품에 오르지 못한

무명순교자 묘역을 참담한 심정으로 둘러봅니다.

 

 

돌 묵주기도길, 장미가 만발한 로사리오정원, 죽산 성지 담장 안쪽 둘레에 

묵주기도를 할 수 있게 돌묵주기도길을 조성해 놓았습니다.

 

 

 

 

 

 

  

 

 

 

 

 

 

 

<죽산성지는 이런 곳이랍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죽산리에 있는 천주교 순교성지입니다.

죽산성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수많은 교우들이 살육됐던 처형지와

교우들을 끌어다 심문과 고문을 하던 관아 터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죽산은 충청-전라-경상도로 나뉘는 길목으로

이러한 지리 조건 때문에 조선 시대에 도호부가 설치되기도 하였답니다.

오늘날 죽산면사무소가 자리에서 천주교인들이 참혹한 고문을 받다가 처형되었는데,

이곳에서 치명한 순교자들은 '치명일기'와 '증언록'에 그 이름이 밝혀진 이만해도 25명에 이른다다고 합니다.

척화비를 세우고 오가 작통으로 '사학 죄인'을 색출, 무차별적으로 교우들을 끌어다가 처형하던

당시의 몸서리쳐지는 박해의 서슬을 생각해 볼 때

그 외에도 얼마나 많은 무명의 순교자들이 목숨을 잃었는지는 셀 수조차 없습니다.

 

죽산의 순교 사화는 참으로 눈물겨운 이야기들뿐입니다.

박해를 피해 산 속으로 숨어들었던 김 도미니코의 가족이 교우인 사실을 안

마을사람 십여 명이 작당을 하고 찾아와 열일곱 된 딸을 내놓지 않으면 포졸들을 불러 몰살시키겠다고 협박,

기어이 딸을 빼앗아 갔다는 이야기도 전해오고 있답니다.

또 60세의 나이에 교수형으로 순교한 여기중은 한 가족 3대가 한자리에서 순교했습니다.

여정문은 아내와 어린 아들이 한날, 한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고 전해집니다.

당시 국법으로는 아무리 중죄인일지라도 부자를 한날 한시에 같은 장소에서 처형하지 않는 것이 관례였습니다. 하지만 죽산에서는 부자와 부부를 함께 처형하는 일이 흔했다고 합니다.

이들이 죽산 관아에서 심문을 받고 끌려가 순교한 처형 장소가 '잊은 터'입니다.

이곳의 원래 이름은 '이진 터'이입니다.

고려 때 몽고군이 쳐들어와 죽주산성을 공략하기 위해 진을 쳤던 자리랍니다.

그래서 '오랑캐가 진을 친 곳'이라 하여 이런 이름으로 불려 왔던 것입니다.

하지만 병인박해를 지나면서 이진 터는 "거기로 끌려가면 죽은 사람이니 잊으라."하여

`잊은 터`로 불리게 됐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가족도 친지도 한번 끌려가면 영영 볼 수 없는 곳,

그 참담한 비극이 이름에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이후 1995년부터 천주교 순교성지로 조성되었으며

현재는 광장, 성당, 피정관, 묵상 산책로, 25명의 순교자 묘, 충혼탑 등이 들어서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