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씩 매운 맛이 확 당기는 날이 있다. 죽 맞는 친구를 만나거나 기분이 꿀꿀한 날 자주 찾던 무교동 낙짓집의 속까지 뒤집어놓던 매콤한 낙지볶음과 쭈그러진 주전자에 꽉꽉 눌러 담아주던 담근 막걸리는 아직도 매력이 있다.
1960~70년 대 무교동 일대에 한 집 건너 붙어있던 '무교동 낙지' 원조집들, 그중에서도 '유정낙지' '서린낙지'와 연(緣)이 깊었다. 2000년대 초반까지만해도 무교동 입구에 버티며 퇴근길 월급쟁이들 발길을 잡던 '유정낙지'. 부잣집 마나님처럼 인상 좋고 넉살 좋은 주인아줌마는 펑퍼짐한 체격만큼이나 마음씀씀이가 커 박봉의 샐러리맨 단골이 꽤나 많았다.
낙지볶음 2인분과 막걸리 너댓 주전자를 시키면 서너 명이 충분히 먹을 만큼 푸짐히 담아내는 썩 매운 맛의 볶음에 조개탕과 계란말이는 서비스로 나왔더랬는데... 그 낙짓집들이 나의 정년퇴직에 맞춰 2000년대 초반 도심재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역사의 뒤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그 때의 서린낙지는 종로1가 르메이르빌딩에 자리잡았고, 유정낙지는 프랜차이즈로 바뀌어 전국에 체인점을 내고 있는가하면 냉동팩으로 변신, 홈쇼핑 인기 메뉴에 오르기도 한다.
"안녕하세요?" "수고하셨습니다." 월~금요일 오후 1시 무렵, '야탑역 1번 출구'의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에서 벌어지는 진풍경. 나이 지긋한 멋쟁이 남녀 시니어들이 '절친'처럼 밝은 표정으로 인사를 나누니, 함께 에스컬레이터에 탄 젊은이들은 "뭔 일이지?" 궁금한 표정을 짓는다. 이 시니어들이 오전 근무 후 퇴근하는 축과 오후 교대 근무를 위해 출근하는 인터넷 포털사이트 IT콘텐츠사업단 직원들이라는 걸 알게되면 아마도 더 놀랄걸.
오늘은 한 달여 전 우리 새내기들이 이 '야탑역 1번 출구'의 이 회사 직원 대열에 합류한 날. 수습기간 우리 신입들의 맨토역을 맡아 수고해주신 선임들과 1번 출구에서 만났다. 그간 가르침에 감사하고 앞으로도 "잘 봐달라"는 아부성 점심 대접을 위해 예약된 곳은 야탑 먹자골목의 신미(辛味·매운맛)낙지.
'스승님'께 장미 한 송이씩을 건네고는 곧바로 낙지사냥에 돌입, 시뻘건 낙지 한 점을 베어무니 알싸한 매운맛에 입안이 화끈거린다. 계란말이, 백김치로도 辛味는 가시지않아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켜대니, '근무들 안할건가?' 멘토님의 눈길이 예사롭지 않습니다. '그러게 만찬으로 하자니까' 군시렁거리며 아쉬운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백일잔치는 필히 불금 저녁에 해야지!
망언다사(妄言多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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